나는 고교시절부터 한국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였고, 사회, 역사 과목은 항상 낮은 점수를 받았다. 최근들어 여러 역사 드라마 및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사실상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 내 ...

대한민국의 역사

나는 고교시절부터 한국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였고, 사회, 역사 과목은 항상 낮은 점수를 받았다. 최근들어 여러 역사 드라마 및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사실상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 내 아는 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형은 나보다 3살정도 많았는데, 특이하게 말이 통하고 재치와 유머가 있는 형이었다. 하루는 학교 내 수업을 그 형과 듣고 있을 때 잡담으로 역사에 대해서 말이 오고 갔는데 그 중 형이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정말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그리고 그 때 '가미카제' 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여러 역사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들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역사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세하지는 않지만 간략하게 요약을 해보았다. 요약이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연대별 각각의 사건에 대해서 주석을 달았다.

70만 년 전 구석기 문화
8000년경 신석기 문화
2333 고조선 건국
2000~1500년경 청동기 문화의 보급
800 고조선, 수도를 랴오허 강 유역의 왕검성에 둠.
450 쑹화 강 상류 일대에 부여가 세워지고, 한반도 남부에 진국이 세워짐
400년경 철기 문화의 보급
320 연나라에서 왕을 칭하면서 고조선을 치려 하자, 고조선에서 왕을 칭하며 오히려 공격함.
221 연나라 장수 진개를 보내 고조선의 서쪽 땅 2000여 리를 빼앗음
209 난이 일어나 연나라·제나라 유민이 고조선으로 피난, 준왕이 서쪽 국경 지역에 거주하게 함
57 신라 건국
37 고구려 건국
18 백제 건국
기원후(ad)
194 고구려, 진대법 실시
260 백제 고이왕, 16관등과 공복 제정 313 고구려, 낙랑군 멸망
372 고구려, 불교 전래, 태학 설치
384 백제, 불교 전래
405 백제, 일본에 한학 전함
427 고구려, 평양 천도
433 나·제 동맹 성립
503 신라, 국호와 왕호를 정함
520 신라, 율령 반포
527 신라, 불교 공인
536 신라, 연호 사용
538 백제,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김
545 신라, 국사 편찬
552 백제, 일본에 불교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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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공격)
581년 북주(北周)에 대신해 수왕조가 개창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는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등 표면적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격파해 통일제국을 수립하고, 돌궐·토곡혼(吐谷渾 : 선비족의 일파로 지금의 청해성 일대에 거주) 등 주변세력에 대한 압력을 가하였다.

이어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거란·말갈 등에까지 세력을 뻗쳐옴에 따라, 요서(遼西)방면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598년(영양왕 9) 고구려의 요서 공격과 수륙양로를 통한 수나라의 반격은 양국의 대립관계를 표면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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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고구려 살수 대첩
(2차 공격)
수나라 육군은 일단 탁군(涿郡 : 지금의 北京)에 집결, 좌우 각각 12군으로 편성해 고구려를 향해 진군하였다. 동원된 병력은 모두 113만 3800명, 군량운반자의 수는 정규군의 배가 되었으며,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도 40일이 소요되었다.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요하 도하작전에 성공한 수군은 곧 요동성(遼東城)을 포위,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과 지휘계통의 혼란 등으로 지구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 수나라는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5천명의 별동대를 편성해 오골성(烏骨城 : 지금의 봉황성)을 경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으로 직공(直攻)해 대세를 결정지으려 하였다.

별동대는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술에 고전하면서 겨우 평양성 30리 지점에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지휘부 내부의 불화, 병사들이 지급받은 개인장비 및 군수품이 과중해 중도에서 몰래 버림에 따른 물자부족 등으로 수군은 더 이상의 진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약점은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고구려 주장(主將)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간파당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그들을 고구려 깊숙이 유도해 그들의 능력을 한계점에 도달하게 한 뒤, 거짓항복을 청해 퇴각할 구실을 만들어주는 척하면서 일대추격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퇴각하는 수군이 살수를 건너고 있을 때 이들을 배후에서 공격해 수나라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는 등 대대적인 전과를 올려 요동성까지 살아간 병력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편, 수나라 해군은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 : 지금의 대동강)를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왕제(王弟) 고건무(高建武)가 지휘하는 고구려 결사대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거기에다가 육군의 참패로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였다. 이처럼 수륙양면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수는 요동성 공격을 중단하고 총퇴각함으로써 두 번째 침략도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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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 고구려, 안시성 싸움 승리


안시성은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영지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이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榮留王)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영류왕 : 고구려의 제27대 왕. 동북쪽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이듬해 4월부터 개모성(蓋牟城:瀋陽 동남쪽) ·비사성(卑沙城) ·랴오양[遼陽] ·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을 대장으로 한 15만의 군사를 안시성에 보냈다. 많은 군사에 당 태종은 두려워하며 기만 전술을 펼쳤다. '당은 교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시해한 신하를 문죄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다하면 잃은 땅도 회복될 것'이라고 두 사람을 기만하였다. 고연수가 이 말을 믿고 있다가 공격해 온 당나라 군에 대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휘하 장수 도종(道宗)은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였으나 성 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막았다.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이에 도종은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60일에 걸쳐 안시성보다 훨씬 높은 토산을 쌓는 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부복애(傅伏愛)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에게 토산의 정상에 올라 수비하게 했으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에서 고구려군이 쏟아져 나와 토산을 탈취하여 당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싸움은 날마다 6∼7회의 가열(苛烈)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요지부동,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9월에 이르러 기후는 이미 한랭하기 시작하고 병마(兵馬)의 양식도 떨어져 당태종은 할 수 없이 철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안시성의 성주가 성 위에 올라 당태종을 비록 바라보고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 성주의 이름은 야사(野史)에 양만춘(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하나 정사(正史)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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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 신라, 첨성대 건립
660 백제 멸망
668 고구려 멸망
676 신라, 삼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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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 국학을 세움, 감은사 창건


682년(신문왕 2)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大王巖)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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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 9주 5소경 설치 : 신라시대 5개 지방의 특수행정구역
687 신라, 문무관료전 지급

689 신라, 녹읍 폐지 세조 지급
녹읍 : 신라 및 고려 초기에 관료(官僚)들에게 일정한 지역의 경제적 수취(收取)를 허용해 준 특정한 지역

698 대조영, 발해 건국
722 신라, 백성들에게 정전 지급 ; 토지

정전 : 신라시대의 토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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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혜초, 당에서 귀국 왕오천축국전 지음

왕오천축국전 : 1권 1책. 신라시대의 승려 혜초(慧超:704∼787)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뒤 727년(성덕왕 26)에 쓴 책이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하였으며 중국의 나진옥(罗振玉)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域)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때는 벌써 불타(佛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造寺設齋)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捨施)하는 독신자(篤信者)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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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757 신라, 녹읍 부활 ; 논밭
771 성덕 대왕 신종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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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 독서삼품과 설치

독서삼품 :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설치한 관리등용법의 하나로서 주로 경서(經書)를 읽는 정도에 따라 상품(上品)중품(中品)•하품(下品)의 3등급으로 성적을 매기어 관리로 등용할 때 차등을 두었는데, 이를 흔히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또는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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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김헌창의 난 발생


신라 하대(下代)에 접어들면서 귀족의 유대의식의 약화로 골품제도(骨品制度)가 붕괴되어가고 진골(眞骨)귀족세력의 분열이 극심하였다. 그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專制主義的)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되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적이고 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어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김헌창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계로서, 그의 부친은 상대등(上大等) 김주원(金周元)이다. 김주원은 선덕왕(宣德王) 6년에 김경신(金敬信:원성왕)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패한 후 강릉으로 물러났으나, 혜공왕 16년(780년)에 일어났던 정변에서 큰 공을 세운 덕에, 그의 두 아들은 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김헌창은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 중앙의 시중(侍中), 청주도독(菁州都督) 등을 역임한 뒤 동왕 13년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이 되었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함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헌창은, 헌덕왕 14년(822년) 3월에 웅천주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난을 일으키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김헌창이 무진주(武珍州:光州) ·완산주(完山州:全州) ·청주(菁州:晋州) ·사벌주(沙伐州:尙州)의 4도독을 위협하니, 국원(國原:忠州) ·서원(西原:淸州) ·금관(金官:金海) 등의 관리들과 군 ·현의 수령들이 이에 항복하여, 한때 충청 ·전라 ·경상 등지의 지역이 이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청주도독(菁州都督) 향영(向榮)이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密陽)으로 가고 완산주장사(完山州長史) 최웅(崔雄)이 조정에 반란을 고함에 따라, 조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왕은 서울을 수비하게 하고 장웅(張雄) ·위공(衛恭) ·제릉(悌凌) 등에게 김헌창을 격퇴하게 하였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헌창의 군대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보은)을 공격한 뒤 속리산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멸하였다. 균정(均貞)이 성산(星山)에서 승리한 뒤 웅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김헌창은 자살하였고 이로써 반란은 끝이 났다. 그 뒤 그의 아들 범문(梵文) 또다시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난을 일으켜 한산(漢山)에 입도(立都)하려고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무열왕 후손들은 두 차례의 반란으로 이후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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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 장보고, 완도에 청해진 설치; 통일신라 흥덕왕 때의 장군 장보고(張保皐)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

889 원종·애노, 사벌주(상주)에서 농민반란
고대사회 및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인 귀족층·봉건영주층에 대하여 피지배층인 농민이 일으킨 반란.

900 견훤, 완산주(전주)에 후백제 건국
901 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 왕건, 고려 건국
926 발해, 거란(요)에 멸망
935 신라 멸망
936 왕건, 후삼국 통일

956 노비안검법 실시; 고려 초기 광종 때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

958 과거제 실시
976 전시과 실시 ; 고려시대에 관리, 공신, 관청, 기타 신분 등에 지급하던 종합적인 토지제도.
983 전국에 12목 설치 ; 고려의 건국 이후 처음으로 설치한 지방행정조직
992 국자감 설치;  고려시대 국립교육기관으로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최고의 교육기관
996 철전(건원중보)의 주조

1009 강조의 정변; 
강조: 고려시대의 무신.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현종 즉위 후 중대사(中臺使)가 되었다. 거란의 성종이 침입해 오자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싸웠다.

1019 귀주 대첩;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1033 고려, 천리장성 축조
1076 전시과 개정
1086 속장경 조판;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심이 되어 판각한 불경.
1087 초조대장경 간행; 고려 현종 때 판각한 고려 최초의 대장경
1097 주전도감 설치;  고려 숙종 때 화폐주조를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1102 해동통보 주조; 고려시대 금속화폐(동전)의 일종
1108 윤관, 동북9성을 쌓음

1126 이자겸의 난
이자겸: 각 지역 호족들을 규합해 개국한 고려는 중기로 접어들면서 지방 호족과 중앙 관료와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점차 문벌귀족사회로 변모해갔다. 중앙의 문벌 귀족들은 기득권 유지, 확장을 위한 주효한 방편으로 혼인관계를 이용했는데 그 중 가장 매력적인 혼인 상대는 왕실이었다. 왕실의 외척이 되어 왕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에 있던 몇몇 가문은 가히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구가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외척가문인 인주이씨 가문의 이자겸(李資謙, ? ~1126)은 왕좌를 찬탈할 야망까지 품을 만큼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1135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45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 무신 정변
1174 정중부, 중방 설치
1179 경대승, 도방 설치
1196 최충헌 집권
1198 만적의 난;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
1231 몽골의 제1차 침입
1232 강화 천도 몽골의 제2차 침입
1236 팔만대장경 제작~1251
1259 몽골과 강화
1270 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대몽 항쟁
1274 충렬왕 즉위
1274 고려·원나라 연합군 일본 정벌 실패 (1차)
1280 정동행중서성 설치
1281 고려·원나라 연합군 일본 정벌 실패 (2차)
1282 정동행성 폐지; 원(元)에 의해 일본 원정을 위한 전방사령부로서 고려에 설치되었던 관서
1285 일연, 삼국유사 완성
1290 성리학 전래;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
1314 만권당 설치;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 세운 독서당
1351 공민왕 즉위
1352 변발·호복 폐지
1356 쌍성총관부 공격
1356 홍건적의 침입
1363 문익점, 목화씨 가져옴
1365 신돈, 개혁정책 펼침
1377 최무선, 화평도감에서 화약 개발 직지심체요절 인쇄
1388 이성계, 위화도 회군
1391 과전법 실시
1392 고려 멸망, 조선 건국
1394 한양 천도
1411 한양에 5부 학당 설치
1413 조선 8도 지방 행정 조직 완성

1416 4군 설치;  

조선 전기 북서 방면의 여진(女眞)을 경략하기 위해 압록강 상류에 두었던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등 4군

1418 세종 즉위
1434 6진 설치;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의 여진족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 즉,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

1441 측우기 제작
1443 훈민정음 창제
1447 석보상절 완성; 조선 세종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왕명으로 석가의 일대기를 찬술한 불경언해서
1466 직전법 실시; 조선 전기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收租地)를 분급한 토지제도
1485 경국대전 완성; 조선시대의 기본법전
1510 3포 왜란;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고도 한다
1543 백운동 서원 세움
1590 일본에 통신사 파견
1592 임진왜란, 한산도 대첩
1593 행주 대첩;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4 속오군 편성; 조선 후기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편성한 지방 군대

1597 정유재란;
임진 왜란 후 왜군에 의한 재침. 임진 왜란 때 패배할 기미가 짙어진 왜군은 화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기화로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는데 이를 정유 재란이라 한다. 이순신은 철퇴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적의 군함 2백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전후 7년 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조선 · 명 · 일본 등 3국에 준 영향은 대단히 컸다.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죽은 뒤 일본 총퇴각 시작
1600 공명첩 발급; 조선시대 수취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백지 임명장
1607 허균, 홍길동전 지음
1608 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1609 일본과 기유약조 체결;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
1610 허준, 동의보감 완성
1623 인조 반정;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 
1624 이괄의 난; 조선 인조 때인 1624년 이괄·한명련 등이 일으킨 반란
1627 정묘호란;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1628 벨테브레(박연) 제주도 표착
1631 정두원이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등 수입
1636 병자호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1637 인조, 삼전도의 굴욕
1645 소현 세자, 청에서 귀국
1653 하멜, 제주도 표착
1658 제2차 나선 정벌
1674 갑인예송; 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두고 일어난 논쟁
1689 안용복, 독도에서 일본인 쫓아냄
1708 전국적으로 대동법 시행
1712 백두산정계비 건립

1725 영조, 탕평책 실시; 

조선 후기 영조(英祖)가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

1750 균역법 실시; 군역(軍役)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
1763 일본에서 고구마 전래
1776 정조 즉위, 규장각 설치

1791 금난전권 없앰(신해통공)
금난전권: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市廛商人)이 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난전을 금지할 수 있었던 권리
난전: 조선시대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은 신흥 상공업자의 상행위 또는 그러한 가게

1794 수원성 축조 시작
1801 신유박해 이승훈 처형;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1811 홍경래의 난; 19세기 초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의 주도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1860 최제우, 동학 창시
1861 김정호, 대동여지도 제작
1862 임술 농민 봉기
1863 고종 즉위, 흥선 대원군 집권
1864 동학 교주 최제우, 처형됨
1865 경복궁 중건~1872

1866 병인박해,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박해: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병인양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1868 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
1871 신미양요 흥선 대원군, 척화비 세움
1873 고종 친정 선포(흥선 대원군 실각)
1875 운요호 사건
1867 강화도 조약 맺음
1879 지석영, 종두법 실시; 두창(痘瘡:천연두)의 예방접종

1881 조사 시찰단 및 영선사 파견, 별기군 창설; 신식군대
영선사: 조선 말기 개화기에 중국의 선진 문물(무기 제조법)을 견학하기 위해 젊은 유학생들을 거느리고 건너가 청나라의 무기제조법 등을 배워오고, 미국과의 수교문제(聯美論)에 관하여 사전 조율하기 위해 중국을 다녀온 사신
별기군: 

1882 임오군란,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 체결; 
임오군란: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

1884 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우정국: 우편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갑신정변: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1885 거문도 영국이 점령
1889 함경도에 흥선대원군이 방곡령 실시; 조선 고종 때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곡물의 수출을 금지한 명령

1893 보은 집회;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
1894 동학 농민 운동, 군국기무처 설치 갑오개혁 시작 홍범 14조 반포

1895 을미사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1896 아관 파천, 독립신문 발간, 독립 협회 설립

아관 파천: 러시아가 조선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고종 황제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셔 간 사건

1897 대한 제국 성립
1898 만민 공동회 개최
1899 경인선 개통
1900 만국 우편 연합 가입
1902 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 개통
1904 한·일 의정서 맺음
1905 경부선 개통, 을사조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1906 통감부 설치;  

일제가 한국을 완전 병탄할 목적으로 설치한 감독기관으로, 이를 통해 일제는 한국병탄의 예비작업을 수행하였다

1907 국채 보상 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황제 퇴위, 군대 해산, 신민회 설립

국채 보상 운동: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였던 사건
신민회: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1908 의병, 서울 진공 작전
1909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
1910 나라를 빼앗김
1919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920 김좌진, 청산리 대첩
1927 신간회 조직
1932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45 8·15 광복
1946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1948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50 6·25 전쟁
1953 휴전 협정 조인
1960 4·19 혁명
1962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6
1972 7·4 남북 공동 성명
1988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
2002 한·일 월드컵 대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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